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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계절

nopoa 2024. 5. 26. 03:45

' 합격 '

이 두 글자로 우리 집이 초토화가 됐다.
•••

내가 예술 고등학교에 합격했다. 그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지만 결과는 놀랍게도 합격. 지금의 우리 집인 부산과는 좀 멀리 떨어져 있는 서울로 올라가야 했다. 그리고 나는 기숙사를 써야만 했다. 개학 이틀 전인 내일, 기숙사로 가야했다. 걱정 많고 그 누구보다 딸바보인 우리 부모님은 내 걱정이 아주 크신 것 같고... 오빠라는 녀석은 집에 자기 혼자라며 오히려 좋아한다.

" 내일 간다며? 나야 좋지. 더 빨리 가도 됐는데 ㅋㅋ. "

" 내일 오라는데 어떻게 더 빨리 가? 공부를 그렇게 잘 하면서 국어는 왜 이렇게 안 되실까 오라버니. "

" 여름이... 엄마 아빠 없이 잘 지낼 수 있지? ㅜ.ㅜ 안약도 잘 보고 넣어야 해... 시력 더 나빠지면 큰일 나! "

" 나 이제 애 아니거든? 그리고 룸메이트 있다고 했으니까 걱정 말고. "

무덤덤한 척 넘겼지만 막상 밤이 되고 침대에 누우니 무서웠다.
어릴 때는 시력이 매우 좋았었다. 초등학생 때 별명이 몽골인이였을 정도로. 하지만 그 별명은 중학교 1학년 때 사라졌다.
시력은 좋았지만 눈 안이 매우 뻑뻑했기에 나는 항상 안약을 넣곤 했다. 그런데, 아직도 기억나지 않는 그 아이가 내 안약에 소독약을 넣은 대참사가 발생했다. 아무것도 몰랐던 나는 당연하게도 안약을 양쪽 눈에 넣었고. 결과는 처참했다. 양 눈 시력 매우 저하와 동시에 심지어 오른쪽 눈은 눈가와 눈알 모두 녹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때부터 항상 오른쪽 눈에는 안대를 써야만 했다. 친구들은 내 눈을 보며 괴물이라고 놀려대기도 하고 못생겼다고 뒤에서 욕하기도 했다. 자존감이 매우 떨어진 내 옆에 어느샌가 항상 붙어있던 존재들은 일명 사마귀 일당이라 불리던 김소연과 최현지, 문수아. 지난 2년 동안 내가 버틸 수 있었던 건 이 아이들 덕이였는데 막상 헤어지려 하니 막막하고 눈물만 났다.
•••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저녁에 싸 놨던 짐들을 모두 챙겨서 차에 싣고 사마귀 일당들과 작별 인사를 했다. 그 셋이 내게 선물을 준비했다며 그 선물을 내게 건네곤 차에 탄 나를 배웅해 주었다. 우리 차가 자신들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생각해 보니 오빠 녀석은 배웅조차 안 해 준다. 한가을 녀석, 잠을 자는 건지 정말 귀찮아서 안 나온 건지 알 수 없다.

선물 박스 안에는 작은 오리 인형 하나가 들어있었다. 평소에 내가 좋아했던 오리 캐릭터의 인형이였다. 나는 그 인형을 뜯곤 바로 내 가방에 걸어서 단톡방에 자랑을 했다. 고맙다고.

이젠 부모님과도 작별 인사를 해야했다. 기숙사 정문 앞에 도착해 버린 것이다.

" ...... 엄마 아빠. 수행 평가 꼭 한 학기 올 A 받아올게. "

" 안 그래도 돼. 아빠랑 엄마는 네가 그렇게 안 해도 노래를 얼마나 잘 하는지 알아. 그리고 여름이 옆에는 항상 아빠 엄마가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울지 말고. 누가 우리 여름이랑 다른 친구랑 차별하고 비교하면 당장 전화해. 아빠가 반 죽여둘게. "

" 아 뭐래... 됐거든? 절대 안 울 거야. 보고 싶을 거야. 사랑해. "

그 말을 끝으로 나는 기숙사를 향해 들어갔다. 나의 기숙사는 304호였다. 기숙사 방에 들어가 보니 아주 깨끗했고 시설도 좋았다. 마음에 들었다. 여기라면 꼭 열심히 생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짐을 다 풀고 폰을 켜니 인스타 디엠으로 한가을에게 디엠이 와 있었다.


" 좀 속상하긴 하네. 돈 필요하면 보내줄게. 거기가서는 절대 비교 당하지 마. 너는 너야. 너랑 다른 애랑 비교하는 애는 네 목소리로 다 압살시켜 버려. 네가 그 누구보다 노래를 잘 한다는 걸 모두에게 보여주고 집에 와라. 울지 마. 이제 널 다독여 줄 수 없잖아. 애처럼 울다가 놀림받지 말고. 거기 가서도 열심히 해. 항상 했던 것 처럼.



믿고 있었다, 한가을. 싫다고 난리를 치지만 결국에는 츤츤거리면서 해 줄 것 다 해
준다. 오빠는 공부를 너무 잘하지만 그에 비해 나는 잘하는 거라곤 노래 뿐이였다. 하지만 오빠는 공부만 너무 잘했고, 나는 노래만 너무 잘했다. 하지만 남들에게는 공부가 더 중요했는지 오빠 반만 닮으라곤 했다. 항상 손가락질 당하는 게 일상이였을 정도로. 그럴 때마다 눈물이 쏟아져 나왔고 누군가와 비교 당한다는 것에 대해 트라우마가 생긴 듯 하다. 항상 한가을이 안아줬는데 이젠 그 포근함마저 느낄 수가 없어졌다. 이제 누가 나 안아 줘? 라는 생각도 문뜩 들기도 했다.


그렇게 침대에 누워서 한가을이 보낸 편지를 계속 읽던 그때, 방 키로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다리가 길었고 눈이 매우 크다. 잘 안 보이지만 확실했던 것은 매우... 예쁘다. 배우하면 예쁠 것 같다라는 생각은 맞았다. 손과 가방에 수두룩한 대본들. 누가봐도 연기과 아이였다. 그런데 그 아이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 하이. 너 부산채성화중 출신이라며? 거기 밴드부 보컬 애들 노래 완전 잘 부른다며. 너가 걔였구나? 잘 부탁해. 연기과 서민주라고 해. 넌 이름이 뭐야? "

" 한여름이야. 네가 맞았어. 밴드부였거든. 칭찬이라... 좀 부끄럽다. "

" 그럼 우리 서로에 대해 좀 알아가는 시간을 가질까? 룸메이트 됐고... 학생증 보니까 너도 4반인 것 같은데. 우리 완전 짱친 되겠네~ "

정답이였다. 우린 너무나도 닮았었다. 화가 나면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스트레스를 풀다가 배탈이 나는 것도, 좋아하는 동물이 병아리인 것도. 한 시간을 서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까 우리는 어느새 절친이 되어 있었다. 난 기분이 좋았다. 처음 오는 지역이라 친구가 단 한 명도 생기지 않을 것 같았지만 나의 크나큰 오산이였다.

그렇게 아침이 밝았다. 화양예술고등학교의 첫 등교날이 밝았다. 나는 교복을 입고 가방을 들쳐 멘 다음 민주와 함께 교실로 향했다.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반에 있던 아이들이 우리에게 몰렸다. 그러곤 질문이 미친듯이 쏟아져 나왔다.

" 와... 공재동 출신과 채성화시 출신이 우리 반이라니. 영광이야 이건. "
" 둘 다 존예네. "
" 이름은 뭐야? 서민주? 한여름? 이름이 여름이라고? "
" 겨울아 여기 네 쌍둥이 있는 것 같은데? ㅋㅋ "

중간에 자꾸만 언급되는 그 이름. 겨울. 이름이 같은 계절이라 비슷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얘네가 너무 오바한다 생각했다. 근데 오바할 만 했다. 성까지 똑같고, 생일마저 똑같았다. 하지만 겨울이라는 그 아이는 바쁜지 정신이 하나도 없어보였다. 그러곤 보건 선생님이 그 아이를 데리고선 반을 나갔다. 잘 보이지 않지만, 나보다 키는 훨 커 보였고 얼굴 또한 귀엽게 생겼을 것 같았다.

" 성도 똑같은데 생일도 똑같고... 이름도 같은 계절이라니. 이거 완전 천생연분이네~ "

" 천생연분은 무슨... 평생에 한 번 정도는 이렇게 마주칠 수도 있지 뭐. "

딱 마침, 선생님으로 추측되시는 젊은 여자 분이 우리 반으로 들어오셨다.

" 음... 얘들아 안녕! 난 너희 반 담임을 맡은 이가영이라고 해. 잘 부탁한다! 아차차, 일 교시는 신체 검사니까 지금 바로 보건실로 가면 된다! 인사 끝! "

그렇게 너무나도 간단한 선생님 자기소개 타임이 끝이 났다. 우리는 바로 보건실로 갔다. 나는 끝번호라 제일 마지막으로 줄을 서고 있었다. 내 차례가 되자, 보건실에 들어가니 아까 겨울이라고 했던 아이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보건 선생님 심부름꾼으로 온 거구나. 근데 그나저나...

" 니가 여름이구나. "

보건 선생님이 나를 아신다... 왜지?

" ... 절 아세요? "

" 응. 알고 말고. 부모님께서 신경 좀 써 달라고 하시더라. 앞이 잘 안 보인다며? "

" 네. 지금 선생님 얼굴도 잘 안 보여요. "

사실이다. 우리 가족의 얼굴도 까먹었고, 내 얼굴 또한 어떻게 변하는지 모른다. 정말 간단하게 말하자면... 장애인이다. 시각장애인. 글씨도 점자로 읽어야 한다.

" 겨울이가 특수반 담당 친구 중에 한 명이거든. 겨울이가 널 많이 도울 거야. "

아까 들었던 그 이름. 한겨울? 얼굴도 모르고 안면식도 없는 아이에게 도움받는 건 정말이지 너무나 싫었다.

" 너 여름이지? 학교 왔는데 친구들이 출석부 보더니 너랑 나랑 쌍둥이냐고 묻더라. 참 신기한 우연이네. 아프면 말해. 내가 도와줄게. 부담갖지 마. "

그 다정한 어조로 내 손에 점자로 적힌 제 전화번호를 쥐어줬다. 뭐지? 이건 무슨 느낌이지? 귀가 불타는 것만 같아. 가슴이 콩닥거리고 알 수 없는 간지러움이 느껴진다. 난 너를 볼 수 없지만, 안 보여도 뻔하다. 또 하나 확실한 건 너는 나의 완벽한 이상형 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귀찮게 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냥 저 아이에게 도움받는 게 싫었다,

" 아프지도 않는데 뭘 도와... 귀찮을텐데 그냥 신경 꺼. 어차피 네가 날 도왔자 속만 터져. 아무것도 안 보여서 계속 넘어지는 게 일순데. 나같은 장애인 도와봤자 소용 없으니까 신경도 쓰지 마. 그리고 넌 내가 왜 앞이 안 보이는지도 모르잖아. "

거짓말이다. 지금도 눈물이 날 만큼 무언가 눈을 찌르는 느낌이다.

" 그러면 더 걱정되는데? 그리고 귀찮긴 무슨. 남 돕는 게 왜 귀찮아? 어떤 미친 사람이 그러냐. 네가 앞이 안 보이는 이유는 점차 알아가면 돼. 부담갖지 말고 필요하면 불러야 된다? "

그 말을 남긴 채 한겨울은 보건실 문을 열고 나갔다. 나 또한 보건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고 보건실을 나와 반으로 돌아갔다. 한 성깔 하는 난 오늘 처음보는 아이에게 싹수없는 말투로 대했다. 계속 내 뒤에는 한겨울이 있었고 결국 반까지 같이 왔다. 그걸 본 민주가 나에게 와서는 동그란 눈으로 질문했다.

" 너 뭐야? 왜 한겨울이랑 동시에 교실 와? 우리 여름이 겨울이랑 뭐 있나... "

" 진짜 뭐라는 거야. 로맨틱한 걸 너무 좋아한다. 그런 거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 "

" 그럼 네 손에 점자는 뭐야? "

거 봐. 이럴 때만 눈치는 빠르다. 이 작은 점자판을 어떻게 단숨에 알아내는 걸까. 결국 보건실에서 있었던 일을 민주에게 모두 털어냈다.

" 와... 선남선녀네! 보기 좋은데? 그리고 한겨울 없어도 내가 네 옆에 항상 있으니까 넌 걱정 말라 이 말이야. "

" 고맙다 고마워. "

어떡하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이에게 도움받기에는 너무나 미안했다. 결국 내가 선택한 방법은 한겨울 피해다니기. 조금이라도 다가오면 모진 말을 뱉으며 보내버리곤 했다. 속으로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인기도 많고 할 일도 많을 아이가 굳이 나같은 장애인을 왜 도우려고 하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 여름아~ 무가 눈물을 흘리면 뭐게? "

"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너같은 애들이나 알겠지.

" 무뚝뚝이지롱~ "

" 여름아~ 학이 침을 뱉으면 뭐게? "

" ... 너 나 도와주겠다고 한 거 아니였냐. 그래서 정답이 뭔데. "

" 퇴학! "

" 그거 듣고 웃는 애가 있긴 해? 도울 거면 돕기나 해. 쓸데없는 말 작작하고. "

그렇게 한겨울에게 모진 말을 뱉은 지 한 달이 지난 오늘은 4월 2일. 엄청난 일이 발생했다.

누군가가 내 오른쪽 눈에 대한 소문을 막무가내로 낸 것. 그리고 나와 오빠와의 관계까지 모두 소문낸 것. 내 눈에 벌레가 들어가서 가린 거라면서, 쌍꺼풀 수술이 오른쪽만 망해서 그런 거라면서. 오빠는 공부를 엄청 잘하는데 쟤는 잘하는 게 뭐냐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여기까지 와서도 내가 받는 건 칭찬이 아닌 비교질이였다. 그리고 가뜩이나 내 눈에 대해 공포증이 있었는데. 점심을 먹고 도서관에 있던 나에게 다가와 내 오른쪽 눈 좀 봐도 되냐고 재촉을 하고 뒤에서는 시끄럽게 웃어댄다. 억지로 내 안대를 벗기려고 하기도 하고 그걸 찍던 아이들도 있고. 그중에 무언의 이름을 들었다. 김현재. 굉장히 낯 익는 이름이였다. 하지만 그때의 나에게는 그 무엇도 들리지 않고 기억나지 않았다. 참을 수 없는 증오와 아픔이 미친듯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결국에는 내가 쓰던 안대의 끈이 끊어지자, 아이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당연한 일이였고 예상했던 일이다. 반 쯤 녹아내린 내 눈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하는 건 흔한 일이였다. 그래서 더욱 보여주가 싫었다. 아이들의 표정과 진심 없는 걱정은 오히려 내 자존감을 더욱 낮춰버리니까. 그리고 난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 ••• 너 울어? "

내 양 눈에서 눈물이 미친듯이 흐르고 있단 것을.

또 시작됐다. 누군가가 자신들 때문에 울고 있으니 일을 키우게 하지 않기 위해 진심 없는 걱정들을 마구 쏟아 붓는 것. 지금으로서는 내 곁에 한겨울이 너무나도 필요했다. 근데 하필 오늘 한겨울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제발 와 줘, 부탁이야. 이젠 네게 모진 말 뱉지 않을게. 내가 다 잘못했어. 얼른 내 곁에 와서 내게 말 걸어 줘. 항상 하는 엉뚱한 농담이여도 돼. 내가 웃어볼게. 제발.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한 달이라는 시간동안 우린 서로에게 정이 들었다는 것을. 억지로 부정한 것일까. 네가 나에게 굉장히 편안한 존재라는 것도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그래서 내가 지금 이렇게 너를 찾는 건가?
그때, 누군가 나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자 내 주위에 있던 아이들 모두가 도망가는 상황이 발생했다. 아직 목소리도 못 들었기에 혹여나 말 해치려고 오거나 이상한 아이일까 싶어 괜히 겁 먹기도 했다.

" 멍청이. 그렇게 욕하면서까지 가라고 한 게 누구면서 이제 와서 나 찾는 거야? 서운하게. "

단번에 알았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들렸다. 한겨울의 목소리가.

" ... 한겨울. "

" 응. 나 한겨울. 왜 울고 있었어. "

" ... "

" 고개는 왜 이렇게 숙였어? 고개 좀 들어봐. "

내 머리를 올리려는 손길에 화들짝 놀란 나는 내 손에 들려있던 책의 모서리로 한겨울의 왼손을 세게 내려찍었다. 정말 짧은 시간에 일어난 일이라 둘 다 조용해졌다. 나는 너무 당황해서, 너는 너무 아파서였겠지. 네가 팔을 부여잡고 주저앉은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정말로, 네게는 이런 내 얼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잘 보이지 않는 네 형태를 찾으려 주저앉아 주변을 더듬거렸다. 그런 내 행동을 보더니 한겨울이 내 손목을 덥썩 잡아채곤 자신의 쪽으로 날 쭉 끌어당겼다.

" 여름아. 왜 그랬어. 네 얼굴 때문이였어? 잘 모르고 네 고개를 억지로 들게 한 건 미안해. 그래도 왜 날 아프게 해. 나 완전 아파. 근데 이래도 예쁘네. 한 번 쯤은 보고 싶었어. 예쁘게 빛나는 네 갈색 두 눈동자를. 네 두 눈동자 모두 보니까 아픈 것도 없어지는 기분이야. "

그 한 마디로 모든 게 다 정리됐다. 너는 참 다정한 아이라는 걸. 결국 네 품에 안겨 어린아이 마냥 엉엉 울어댔다. 널 아프게 했는데도 이렇게 다정한 네가 너무 짜증났고, 네 팔에 흉 지게 한 나도 너무 미웠다.

" 너한텐... 안 보여주고 싶었단 말이야. 무서웠다고. 내 눈을 보고 무섭다며 도망칠까 봐... 나랑 친구하고 싶지 않아 할까 봐. 안 보여주고 싶었다고. 그리고 널 아프게 할 생각도 없었는데... 진짜야. 믿어주면 안 돼? 진짜야. 진짜... 제발 한겨울, "

" 누가 안 믿는대. 아까 말했잖아. 예쁜 네 눈 보니까 아픈 게 싹 사라졌다고. 울지 말고 뚝 해. 네 눈, 아주아주 예뻐. 전혀 무섭지 않고 도망칠 생각도 없어. 나도 미안해. 너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던 내 실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그리고 내 팔 아프게 한 대가로 오늘 하루종일 같이 있어 줘. "

당연하단 듯 한겨울의 품에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손을 더듬거려 네 팔에 상처가 난 부위를 매만졌다. 아픈지 움찔거렸다. 움찔거리는 한겨울에 내가 더 아프게 했나 싶어서 다급히 손을 떼어 내자 다시 내 손을 제 상처 부위에 가져다 댔다.

" 계속 이러고 있어 주면 안 돼? "

" ... 안 될 게 뭐야. 아프지. 미안해. "

내 대답에 싱긋 웃는 것 같더니 내 손목을 잡고 일으켜 세워 나를 쇼파에 앉혔다.

" ...또 뭐가. 뭐 하려고 이래. "

" 이렇게 봐야 네 눈이 조금 더 잘 보이기도 하고. 내 얘기도 좀 해 보려고. 난 어차피 너에 대해서는 너희 부모님께 다 들었거든. 하지만 넌 나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잖아. 그치? "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한겨울은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정작 나는 한겨울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 내 이름이 왜 한겨울이게. 내가 태어난 건 분명 한여름이였는데, 몸이 한여름에 태어난 것 치고는 너무 차가웠어서 겨울이로 지은 거래. 근데 그 차가운 게 아직까지도 있다? 추위도 엄청 잘 타고 수족냉증도 있어. "

이름에 대해서도 비슷한 게 많았다.

" ... 나돈데. 한겨울에 태어난 것 치고는 몸에 열이 너무 많아서 여름이라고 한 것도 있대. 근데 그 현상이 지금도 나타나. 너와는 다르게 난 더위에 약하고 감기도 자주 걸려서 항상 몸이 불덩이거든. 그나저나... 손 괜찮은 거 맞지? "

" 응? 진짜 괜찮다니까. 걱정하지 말고 이제 나가자. "

울어서 내 볼에 덕지덕지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내 주고, 내 손목을 잡아 나를 일으켜 세워주었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한겨울의 왼팔에 큰 흉터의 흔적이 보였다.



•••




난 분명 너한테 모진 말을 뱉고 네 팔에 흉터까지 지게 한 장본인인데. 어째서 그런 나에게 다정이라는 감정을 베푸는 거야? 그런 네 행동 때문에 더욱 짜증났다. 사과는 못 하겠고, 괜스레 더 미안해지기만 하고.

날 용서해 줘. 이런 감정은 처음이였어.

누군가 보고 싶고 편안한 이 느낌 말이야. 그리고 난 네게 이런 흉측한 얼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어. 내가 네게 한 모든 말은 다 진실이 아니야. 네가 나로 인해 귀찮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날 싫어하게 만든 거였어. 하지만 돌아보니까 네가 나를 좋아해줬으면 좋겠다고 바라고 있더라.




난 처음부터 네가 좋았는데. 너와 있으면 편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너는 그런 내가 부담스러운 걸까. 자꾸 숨어버린다. 난 널 처음 봤던 그 순간부터 너만 바라봤어. 네가 내 몸에 어떤 흉터를 남겨도 너였기에 용서가 된 거야. 난 결국 너랑 있어야 편안함이라는 걸 느낄 수 있으니까.

내가 미안해. 이런 감정은 처음이라.

나로 인해서 네가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네 편안함이 되고 싶어. 이름도 여름과 겨울이야. 한여름과 한겨울. 너는 나를 유독 추웠던 3월 1일 개학 날부터 알아왔고, 나는 너를 유독 더웠던 4월 2일에서야 알아버렸다.